지금 나는 삶에 대해 진지하지 않다.
그래도 한 때는 아주 진지한 적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어김없이 사랑이 찾아왔다.
오래된 벽에
귀를 기울여 본다.
"삶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라."
이번엔 반대쪽 귀를 갖다 댄다.
또 다른 세상도 함께 눈에 들어온다.
" 삶은 그 자체가 축복이다."
나는 삶에 대해 진지하지 않다.
깨달음이 뭔지 모른다.
사랑도 하고 싶다.
동시에
사랑은 당나귀 똥이라 생각한다.
엉멍진창이다.
그래도 최소한 거짓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런 인간은 최악이다.
***
"이봐 여자는 무엇때문에 산다고 생각해?"
"구두바닥."
그는 단숨에 맥주잔을 비우며 말했다.
그는 나같은 인간(나는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한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술이 강했다. 가끔이지만, 밤새 아무렇지 않게 술 마시고 있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나란 존재가 형편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왜냐면 그는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듯 멀쩡했기 때문이다. 변함없이 이른 시간에 출근했고, 같은 양의 책을 읽었으며 저녁이면 젊은 여자아이들과 데이트를 했다. 그리고 젊은 여자아이들과 데이트가 없는 날(대부분 금요일 저녁이었다.)은 나를 만나 혼자 술을 마셨다. 어째서 그가 금요일 저녁은 여자와 약속을 잡지 않고 나와 함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볼 기회는 수 없이 많았지만, 몇번인가 물어보려 하려다 그만두었다. 그건 어쩌면 나의 보잘 것 없는 자존심의 마지막 몸부림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저런 이유로 그는 나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평소 나는 무엇을 하든 그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려 했다. 물론 그런게 잘 될리 없었다. 그렇게 그는 변함없이 완벽히 자신의 삶을 굴려갔고 나 역시, 죽기 직전의 당나귀가 부서지기 직전의 수레를 끌고 가 듯 힘겹게 삶을 굴려갔다.
그는 그날 밤도 변함없었다. 술을 대하는 태도는 완벽했다. 내 앞에는 변함없이 오렌지 쥬스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보고 말았다. 그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걸. 그가 잘난 게 아니라, 그저 생물학적인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그의 모든 것이. 심지어 사업과 인생마저도. 그리고 그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도.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하루키씨의 말이니 믿어도 좋아. 그는 여자한테 인기가 아주 좋거든. 심지어 그의 책을 읽고 창녀가 된 여자도 있다구. 나도 그의 덕을 봤을 정도니까."
처음이었다. 그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 건.
여자에 관한한 그의 말은 진리에 가깝다. 그는 마흔이 되는동안 약 천명의 여자와 잠자리를했다. 처음 그의 이야기를 들 었을 때는 의심했지만, 그가 확인차 세달동안 매일 다른 여자를 내게 보여주고 잠자리까지 가는걸 본 뒤로는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의 나이에 천명의 여자는 그리 많지 않은 숫자도 아니었다.
지금도 그는 혼자다. 절대 망할 일 없는 중소 사업채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덕에 고급 승용차와 바다가 보이는 멋진펜션, 서울 논현동에 방 세개짜리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은행에서는 언제나 vip고객. 변함없다. 오직 주변의 여자만 바뀔 뿐이다.
"그럼 타이어는?"
그는 텅빈 맥주잔을 허공에 멈춰 둔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맥주잔은 완전히 텅 비진 않았다.
약간에 거품은 묻어 있었다.
나쁘지 않다.
"그러니까 네가 여자한테 인기가 없는거야. 오버하지 말아야 돼. over."
그의 말이 맞다.
옳은 것이라도 때에 맞지 않으면 악이 되는 법이다.
***
거리를 걷다 지치면 다시 오래된 벽에 기대어 쉰다.
거리에는 오래된 벽이 양 옆으로 늘어서 있다.
오랫동안 기대어 있지 못한다.
오래된 벽은 너무 차갑다.
온도의 차이.
다시 걷는다.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저 멀리 새하얀 구름이 보인다.
세상이 그냥 하얗게 보인다.
눈물 방울.
그리운 색이다.